한국영상자료원이 일제강점기 한국영화 발굴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고, 이에 따른 결실이 가시화된 것은 2004~2005년이다.
중국전영자료관 소재 극영화 수집 1차 경과
2004년 11월 1일 ~ 11월 6일
이효인 원장 등 한국영상자료원 조사단이 중국전영자료관(관장: 첸 징리앙 Chen jingliang)을 방문하여 <군용열차>(서광제, 1938), <어화>(안철영, 1938), <집 없는 천사>(최인규, 1941), <지원병>(안석영, 1941) 이상 4편에 대한 소장 정보 확인 및 국내 반입 합의
2004년 12월 6일
<군용열차> 등 4편 필름 인수 완료
2004년 한국영상자료원 조사단 중국전영자료관 방문 모습, 제공:
한국영상자료원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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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베이징 1, 조공
이튿날 회의 자리에서 그간 중국을 통해 입수된 한국영화 관련 각종 정보들에 대한 판단을 들었다. <아리랑>을 몇 십만 달러에 건네겠다는 사기성이 농후한 서신에 대해서는 그 서류를 책상 위에 던지며 화를 내곤 속지마라고 충고한다. 확인도 확인이지만 당신들의 의견에 따르겠다는 징표를 보여주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다. 충고를 던진 첸 관장은 진메이에게 뭐라고 하더니 서류 한 장을 받아서는 나에게 준다. 그 서류에는 일렬번호와 함께 <군용열차> <어화> <집 없는 천사> <지원병> 등이 적혀있었다. 정신이 아뜩해졌다. 고래를 들어 첸 관장을 보니, 그는 웃으며 “필요하면 주겠다”고 한다.”
- 이효인, 「해외에 숨겨진 한국영화를 찾아라! 국내 최고(最古) 영화 발굴기」, 『필름 2.0』,2006.3.17.
2005년 중국전영자료관 방문 시 데이터베이스 검색 모습, 제공:
한국영상자료원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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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전영자료관 소재 극영화 수집 2차 경과
2005년 11월 7일
일제강점기 한국영화 2편 소장 확인
2005년 11월 15일~11월 16일
한국영상자료원 조사단이 중국전영자료관 방문하여 <미몽>(양주남, 1936), <반도의 봄>(이병일, 1941), <조선해협>(박기채, 1943) 등 3편 소장 정보 확인 및 국내 반입 합의
2005년 12월 27일
등 3편 35mm Print 인수 완료
" S#4 베이징 2
2005년 8월. 중국에 진출한 처음 듣는 이름의 상사로부터 괴이한 전화가 왔다.(중략) 괴이한 전화의 내용은 해방 전 한국영화를 많이 갖고 있으니 편 당 10만 달러에 사라는 것이었다.
(중략) 그들은 분명히 필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마침 중국통 한국인이 베이징에 머물고 있었기에 그에게 중국전영자료관을 찾아가달라고 했다. 모 상사로부터 받은 영화목록 중 몇 개를 선택해서 그에게 넘긴 것이다. 그러자 두 편이 걸려들었다. 바로 <반도의 봄>과 <조선해협>이었다. 됐다.
직접 나설 단계다. 중국 전영자료관에 서신을 보내고, 직원 두 명을 베이징으로 급파했다. 해방 전 한국영화 수십 편 명단과 감독, 배우, 스태프 이름을 들고 접근하기 어려운 중국전영자료관 데이터베이스 조사를 허락 받았다. 다음 날 출장 직원의 전화.
“<미몽>을 찾았습니다.””
- 이효인, 「해외에 숨겨진 한국영화를 찾아라! 국내 최고(最古) 영화 발굴기」, 『필름 2.0』,2006.3.17.
2006년에는 중국전영자료관이 보유하고 있는 1945년 이전 일본영화의 데이터베이스 목록을 받아 조사를 진행한 결과, ‘조선군보도부’가 제작한 <병정님 兵隊さん>(방한준, 1944)을 추가 발굴했다.
2006년 5월 18일
중국전영자료관으로부터 필름 정보 목록을 문서 형태로 전달받음
2006년 6월 5일
목록 조사 결과 <병정님> <그대와 나>(허영, 1941) 확인
2006년 8월 17일
<병정님> 35mm Print 입수 완료
(조선군보도부 제작, 방한준, 1944), 제공:
한국영상자료원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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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사이 8편의 극영화가 발굴되었다는 것은 일대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이전까지 한국영상자료원의 식민지기 조선극영화 컬렉션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은 1989년 2월 일본의 도호영화(東宝映画)로부터 수집한 <젊은 모습>(토요타 시로, 1943), <망루의 결사대>(이마이 다다시, 1943), <사랑과 맹세>(최인규, 1945) 단 3편이었기 때문이다.
크레디트, 제공:
한국영상자료원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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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해협> 크레디트. 자료영화 / 중국 전영자료관 복제수장 / 호북(후베이)전영제편창 / 1986년 인화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한국극영화 프린트들이 왜 북경의 중국전영자료관에 소장되어 있었을까?
현재 우리가 이 프린트들의 이력을 추적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록은, 프린트의 첫 부분과 프린트의 첫 부분의 기록이 유일하다.
크레디트, 제공:
한국영상자료원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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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몽> 크레디트. 자료영화 / 중국 전영자료관 복제수장/ 장춘(창춘)전영제편창 인화
“<미몽> 프린트의 첫 부분에는 장춘전영제편창(영화촬영소)이 인화해서, 중국전영자료관에 수장했음을 기록하고 있다.1955년 동북전영제편창에서 개칭된 장춘전영제편창은, 일제 패망 이전 만주국의 만주영화협회(이하 만영)의 촬영소를 기반으로 설립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 선언 후, 만영은 중국 팔로군과 소련군의 손에 놓이게 된다. 팔로군이 먼저 만영 접수를 계획했지만, 소련군이 먼저 만영의 기재와 필름을 접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팔로군은 소련군과의 협의 끝에 만영의 제작기술자를 중심으로 만영 재건을 결정, 1945년 10월 1일 만영의 전 시설을 접수하여 동북전영공사를 설립했다”
-김려실, 『만주영화협회와 조선영화』, 한국영상자료원, 2011, 48쪽.
하지만 흥미롭게도, 조선극영화의 경우 러시아 고스필모폰드(Gosfilmofond of Russia)가 아닌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미몽>의 경우는, 첫째 팔로군이 먼저 접수했을 가능성을 조심스레 제기해 볼 수 있고, 둘째 <미몽>의 프린트가 다수 존재했기 때문에 이후 다른 지역에서 장춘촬영소로 추가 수집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한편 <조선해협> 프린트의 첫 부분에는 호북전영제편창이 인화해서, 중국전영자료관에 수장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즉 <조선해협>의 경우, 후베이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애초에 러시아군에 의해 접수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후베이영화촬영소는 1958년 설립된 무한영화촬영소가 전신으로, 1979년 후베이영화촬영소로 개칭했다.
무한촬영소는 국민당 정부가 남경에서 천도한 곳이었다. 1938년 10월 일제에 의해 무한촬영소가 점령되자, 국민당 정부는 다시 중경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후 중일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처럼 식민지기 한국영화가 발굴된 장소는 일제의 침략 전쟁의 동선과 연결되어 있다. 즉 당시의 조선영화가 제국 일본의 ‘대동아’ 영화네트워크에 탑재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국 일본의 중국 침략 지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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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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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해협>(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 박기채, 1943)
더 이상의 후속 발굴은 힘들지 않을까 하는 평가도 있었지만, 2007년에는 갑자기 국내 소장자를 통해 질산염(nitrate) 필름으로 된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안종화, 1934)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상영용 프린트가 아닌 원본 필름(Original Negative)이며 완본에 가까운 첫 무성영화라는 점에서 영화사적 의미가 크다.
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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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한국영상자료원 조사단 방문 시, <청춘의 십자로> 필름은 <장한몽>(이경손, 1926), <무지개>(이규환, 1936) 등의 제목이 기재된 철 캔에 보관되어 있었다.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단성사 극장을 인수 운영한 故 오기윤의 자제가 <청춘의 십자로> 필름을 보유하고 있었다.
총 9롤(4,915ft)이었고, 검색결과 1롤은 최종 권의 “끝(完)” 표시가 있는 자막롤, 1롤(약 7~800여ft)은 본편인 것으로 추정되나 심한 부패와 백화현상으로 검색이 불가능 했다. 나머지 7롤만 복원에 착수했다.
백화 된 필름, 제공:
한국영상자료원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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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백화 현상이 발생한 한 롤. 줄거리 상 주인공 원용의 시골 장면으로 추정된다.
(금강키네마, 안종화, 193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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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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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에는, 국내외 역사학자, 영화사 연구자들이 영화의 실체에 대해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대와 나 君と僕>(1941)의 일부 필름(2롤 분량)이 일본 국립영화센터(NFC)를 통해 발굴, 한국영상자료원으로 수집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조선군보도부가 제작한 <그대와 나>는 히나쓰 에이타로(日夏英太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인 허영(許泳)의 감독 데뷔작이다
광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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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란 내지인이다. ‘나’란 반도인들이다. ‘그대’와 ‘나’의 손은 강하게 연결되어, 장대한 아시아의 정통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이 아름다운 공감의 날에 퍼 올린 정서와 숭고한 외침을 칭송하면서 매력적 대작(巨篇)이 풀렸다.”
- <그대와 나> 광고, 『영화순보(映画旬報)』, 1941년 11월 1일호(30호)
『영화평론(映?評論)』 1941년 7월호, 50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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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도 조선은 처녀지이다. 오늘날 영화가 단순히 자본가를 위해서나 개인주의적 예술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상 당연히 국가의식의 노선에 따라야 한다. 국민의 요구는 정치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앞으로 새로운 조선영화에서도 조선당국의 정치력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을 영화의 힘으로 보완하고 국민의 의욕을 충족시켜 가야 한다. 이 점에서도 내선 두 영화계의 교류는 그들의 장단점을 서로기탄없이 맞추어 보고, 보다 나은 일본인이 되기 위한 반도 융합을 준비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안건일 것이다.”
- 히나쓰 에이타로, 1941년 6월 3일 경성에서내선 두 영화계의 교류에 대해, 『영화평론(映画評論)』 1941년 7월호, 50쪽.
조선인 영화예술가들은 영화를 계속 만들기 위해 제국 일본의 국책영화 체제로 걸어 들어갔다.
임화가 언급했듯이 “예술가인 외에 다른 도리가 없는” 조선영화인들은, 기업과 국가와 국민과 본인을 위해 성실하게 영화를 만드는 본분을 다하는 쪽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일/저항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에서 벗어나 일제강점기 때를 다시 검토한다면, 조선영화 텍스트에 새겨진 식민지 근대의 흥미로운 양상들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이후 ‘일제강점기 한국영화사’ 연구에 이른바 붐이 일고, 연구 지형이 간학문적(間學問的) 활력을 얻은 것은 한국영상자료원의 잇단 발굴 작업에 기인한 바가 크다.
식민지기 조선영화들이 발굴된 직후, 한국영화 연구자들로부터 가장 큰 논란을 야기한 작품은 바로 <집 없는 천사>(고려영화, 최인규, 1941)일 것이다. 그간 한국영화사 기술에서 계몽적 리얼리즘 영화로 평가 받던 이 작품은, 마지막 일장기 게양식 시퀀스로, ‘친일영화’ 논쟁을 일으켰고, 이는 ‘친일영화’ 프레임에 대한 논쟁으로 나아갔다.
“최인규는 차기작 <집없는 천사>를 통해 세계영화사의 한 조류인 네오리얼리즘이 조선에 당도하기 전에 이미 그러한 기법의 영화를 선보였다. 영화의 형식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이러한 광폭한 군국주의 시대에 있어서는 작가의 최후의 저항선이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1969(초판), 2004(개정증보판), 202쪽.
(고려영화, 최인규, 1941),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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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 볼 수 없는 기록! 일본인이 일본의 일부라는 조선에만 있는 사실! 무엇으로 인하여 조선의 가로에만 거지가 낭자하여야 하는가? 이것을 영화를 통하여 다시금 일본의 위정자에 항의하려 함이 나의 진의도였다. 작품은 완성하여 또 역시 총독상을 받았고, 동경서 문부대신상까지 얻었으나 일분의 기괴한 모략으로 전례 없이 대신상을 취소 받는 동시에 재검열로 3개소 약 2,000척의 대삭제를 당하였다. 이것도 일종의 민족적 비애라 아니할 수 없었으니 도쿄제국호텔 창문에 실심에 가까운 자태로 두 시간여나 말없이 서 있던 생각이 새롭다.”
-최인규, 「최인규 영화 특집 <국경>에서 <독립전야>에-10여 년의 나의 영화 전사」 , 『삼천리』복간 제5호, 1948년 9월호, 18쪽.
“물론 이 언급을 1948년이라는 시기에 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변명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왜 일본의 위정자에게 항의하기 위해 만든 영화가 총독상에 더하여 문부대신상까지 받을 수 있었는가? 이 사실이 어떤 권위로 인정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상’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절대가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언급은 해방 직후의 시기에 자기 정당화에 급급했던 자가 빠져든 인식의 오류, 즉 거짓말이 될 것이다. 나는 이후의 한국영화사가 계속해서 인용하고 있는 그의 말이 결코 거짓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실제로 최인규는 일본의 위정자에게 항의하기 위해서 거리의 아이들의 비참한 상황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영화에 일본의 위정자가 내린 상이야말로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정말로 문부대신상이 취소된 것에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 질문은 바로 그 ‘진심’으로부터 시작된다.”
- 이영재, 『제국 일본의 조선영화』, 현실문화, 2008, 168쪽.
집없는 천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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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없는 천사>(1941)촬영 현장에서. 왼쪽부터 김신재, 최인규.
(고려영화, 최인규, 1941) 스틸1,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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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영화, 최인규, 1941) 스틸3,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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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영화, 최인규, 1941) 스틸2,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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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영화, 최인규, 1941) 스틸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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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화는 방금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고도의 통일적 기업화의 관문에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또한 하나의 근본적인 전환기를 체험하기 시작한 오늘 우리의 영화작가들은 커다란 시련 하에 섰다고 보지 아니할 수가 없다. 거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의 선행자들의 업적에 대하여 신중해야 할 것이며, 또 스스로의 길에 대해서도 예술가인 외에 다른 도리가 있을 수 없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 밖의 일은 각기 그 방면의 적임자가 수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성실을 통해서만 기업엔 이윤을,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겐 쾌락을 그리고 자기는 성과를 각각 주고 차지하는 것이다.”
- 임화, 「조선영화론」, 『춘추』, 1941년 11월호, 92쪽.
임화, 「조선영화론」,『춘추』10호, 1941년 11월호. 92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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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식민지 지식인 임화의 언급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조선영화인들의 분열적 사고와 그 배경이 더 흥미로운 지점일 수 있다.
친일의 굴레를 씌우는 단죄의 행위로, 우리의 식민지 경험이 청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 일제의 전시 체제를 맞아, 영화예술에 대한 사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했던 나약한 예술가들의 심성 구조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를 통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는 자랑스러운 것만을 계승시키지 않는다. 부끄러운 것도 유산이다. 더욱이 영화는 가시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성이 높다. 영화는 산업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당대의 삶의 모습, 언어, 풍속, 유행과 가회상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모습을 함축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영화예술이 문화재로서의 가치와 위상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김종원, 「광복 60주년 기념 해방영화와 친일영화 발굴 공개」, 『해방의 기쁨과 억압의 흔적 자료집』(국회 특별 상영 및 기자 회견) , 2005.2.28.
김종원, 광복 60주년 기념 해방영화와 친일영화 발굴 공개“해방의 기쁨과 억압의 흔적” 자료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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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처럼, 한국도 근대문화유산을 보호하려는 취지에서 ‘등록문화재’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2006년 한국 고전영화 역시 문화재로 등재하자는 논의를 시작했고, 2007년 해방 전 영화로는 유일하게 <미몽>이, 해방 후 작품 6편과 함께 등재되었다. 2008년 발굴된 <청춘의 십자로>는 2012년 추가로 근대문화유산의 지위를 얻었다.
문화재 등록
2007.9.17 1936년작 <미몽>(342호)
2012.2.16 1934년작 <청춘의 십자로>(488호)
문화재로 등록된 해방 이전의 한국 고전영화들은, 당시 시점으로는 ‘최고(最古)’라는 타이틀이 선정의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다. 이제는 식민지 경험이 오롯이 새겨진, 나머지 발굴된 조선극영화들을 냉정하게 평가할 차례이다.
(박기채, 1943) 촬영현장 기념사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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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해협>(박기채, 1943) 촬영현장 기념사진
제공: 스토리
Curator—Chung Chong-hwa, Korean Film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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